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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항공우주연구원

중국의 우주전략과 정책발전 과정(1)

  • 이름 이옥규
  • 작성일 2015-07-09
  • 조회 5037

Ⅰ. 서 론


중국은 50년간에 걸쳐 우주개발에 매진하여 최근에는 우주개척 및 선진국가인 미국, 러시아에 버금가는 국가로 바뀌었다. 선조우 우주선의 발사에 따라 급부상하기 전까지 중국 우주프로그램을 인지하지 못하였던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이 “무”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였다. 중국은 우주개발사업을 미국, 러시아 보다 더욱더 권위 있게 추진 중에 있으며, 이와 반면에 우주선진국(특히, 미국)은 예산과 미래방향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 이 주제는 중국이 우주분야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이러한 성공이 국내외 목표를 어떻게 이룩하였는지를 평가하는데 있다.


중국 우주분야의 부상을 흥미롭게 하는 부문은 G-20국가 중 중국이 잠재적 경쟁이 훨씬 낙후되어 있는데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우주사업을 추진해왔다. 흥미 있는 부문은 중국의 우주프로그램이 소련의 1957년 스푸트니크 발사 후 미국 군부가 우주사업을 추진했던 방법과 동일하게 수행하였다. 이때 미국 우주프로그램은 완전히 군부에 의하여 추진되어 왔다. 이러한 미국의 군부통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일본은 사전 경고도 없이 일본 영토를 날아간 1998년 북한의 우주발사 사건을 계기로 재빠르게 원격탐사위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 항행시스템(GNSS)을 갖춘 유럽은 중국을 파트너로 끌어 들일 때 안보 측면을 고려하였다. 특히, 중요한 위성자료는 양자 협력관계와 중국이 2억 유로를 투자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공유를 하지 않는다.


중국의 우주프로그램은 인민해방군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위성과 같은 다른 우주활용분야는 발전 속도가 느렸다. 전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중국의 이러한 사업추진은 명확한 선택이었다. 그 이유는 인텔셋이 경제적으로 미개발국을 전 지구 통신시스템에 포함시키고, 또한 미국이 우주활용 추진을 할 수 없는 국가들에게 글로벌 우주시장을 조기에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의 진전은 완만하였으며, 그 이유는 중국이 첨단기술 사업에 선제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기술능력을 상당하게 재고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지속적인 정치와 업무환경의 혼란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국가우주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예를 들면, 모택동 주석은 한때 상하이에서 수행되고 있는 우주프로그램을 호의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이유는 임표 몰락 후 문화혁명 기간 중 모택동의 주요 지지자인 4인방과의 정치적으로 연계되었고, 질적인 성과보다 더 충성이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바라본 우주에 관한 시각은 본래 사업추진의 어려움에 대하여 낮게 평가하고 완전히 정치적인 부문에 중점을 두었다. 스푸트니크 발사 후 중국은 미국과 그 동맹국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권 지원을 철회하는 소련과 진행 중인 공산권 블록의 붕괴에 의하여 고립되었다. 예를 들면, 모택동의 견해는 중국이 필요한 정도까지 “부투스트랩(독자적 추진하는 힘)”에 의하여 유지되는 국가라고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독자적 추진”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운동과 함께 시작한 최초의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주의 군사적 활용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입장은 미국과 아시아 우주선진국인 일본과 인도에서의 우주의 군사적 활용에 관하여 걱정하고 있다. 비록 인도의 군 지휘관과 방위전략가들이 인도정부로 하여금 우주안보활동을 촉구한다 할지라도, 인도에서의 우주의 군사적 활용이 군사 우주프로그램에서 실제적인 개발보다 더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우주프로그램은 2011년 지진, 쓰나미, 그리고 핵 위기, 신규 군사우주프로그램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당면한 예산과 조직적 이슈에 관한 업무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의 우주프로그램은 일본, 중국에 비하여 훨씬 뒤쳐져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노력은 꾸준히 추진되어 왔으나, 나로호 발사체의 기술적인 결함에 의하여 시달린 때가 있었다.


중국의 우주활동은 최근 기술적으로 개도국과 후진국으로부터 많은 주목과 국위선양의 매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우주정책은 국가의 국위선양과 국제적 위상을 극대화하는 우주활동을 전개해왔다. 중국의 우주전략과 정책은 변화하는 국제환경과 경제·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우주프로그램을 명확하게 활동기간을 통하여 구분하여 수행되었다. 특히, 중국 우주프로그램 특징은 1단계(우주와 군사적 관계), 2단계(경제·기술적 발전), 3단계(정상화를 향하여), 4단계(정상화) 등 명확하게 4단계 발전과정을 통하여 수행되었다.

 

Ⅱ. 본 론


1950년도 초반 우주시대에 중국이 늦게 진입한 이유는 기술적 후진성 때문이다. 1958년 대약진운동과 1966년 문화대혁명의 두 가지 혼란 과정이 일어났으며, 이들 운동은 1976년 모택동 사후에 종료되었다. 이 두 가지 큰 사건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몇 가지 부문을 제외하고 중국의 발전에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주프로그램 또는 적어도 발사체분야는 최초의 중국 위성이 1970년 4월 24일 궤도에 도달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위하여 중국이 중점적으로 추진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1. 제 1단계 : 우주와 군사적 관계

1단계는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최초 인공위성 발사 후에 일어났다. 이러한 위성발사 성공이 군사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게 가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우주와 군사적인 관계는 강건한 우주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모든 국가의 노력에서 명확하게 찾아 볼 수가 있다. 하나의 예외적인 국가는 일본이며, 이 국가의 우주프로그램은 대학에 기반을 둔 연구로 시작하였다. 아울러, 일본은 어떠한 군사적우주활용을 금지하고 우주를 평화적이고 비공격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헌법에 따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내부의 합법적이고 정치적 논의가 종료된 2008년에도 일어났다. 오늘날 이러한 새로운 발전과 보다 전통적 민간부문 강조가 빈약한 가운데 일본은 군사적인 우주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번 개발된 미사일이나 부스터는 위성을 옮기거나 또는 장거리를 날아가 방위능력이 없는 목표물을 타격시킬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대부분 국가가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추구하는 이유는 대부분 국가들이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부문은 우주개발사업이 많은 면에 있어서 민군겸용 이중성이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국가위상과 활용성과 함께 미사일 개발능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모택동 주석은 최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우주발사에 대하여 정치·군사적 메시지에 관심을 보였다. 1950년대 역사적인 시점에서 중국은 적대 관계인 미국과 고립되어 있었고, 우주개척 국가인 소련과의 정치적 분열의 초창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의 위협은 한국에서의 평화회담 종료를 요구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보도된 비밀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타협의 실패는 미국이 중국과 북한 동맹국에 1945년 일본에서 사용된 이래 보다 전례 없는 피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가 있도록 이끌 수가 있었다. 이러한 위협은 10년 전에 일본에서 두 차례 사용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신뢰성을 갖고 있다. 핵무기에 관한 중국의 견해는 다방면으로 해석되었고, 그러나, 핵무기가 아시아비백인 국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는 극단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모택동 주석이 표명한 견해는 중국에 대한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생존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1960년 후반에서야 우주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 이 두 가지 프로그램인 미사일 개발과 핵무기는 중국의 리더십 관점에서 볼 때 불가분한 관계였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추진해온 우주프로그램을 반영하여 소련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 사실, 아이젠하워를 위하여 시급한 전략무기는 너무 긴요하기 때문에 위성을 궤도에 보내는 명확한 기회가 없어졌으며, 감리요원들은 육군 미사일시험 발사체를 점검하여 어떠한 위성도 탑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증하였다. 폰브라운과 그의 팀은 육군 프로그램사업단에 속하였고 1950년 중반까지 발사체가 비행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초 미국위성을 궤도에 진입하는 시도를 잃어 버렸다. 탑재체가 대통령 승인 없이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다른 이슈는 고의적인 연기에 있다. 지구궤도위성에 대한 자유통과 권한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궤도평화위성이 공격을 받지 않는다. 평화적이란 협의 의미는 탑재무기가 없고 비공격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지구궤도에 확장함으로써 정의되는 국가 영공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모든 위성이 국가영공을 이탈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차단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영공이란 정의는 100km가 참고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된 선은 없다.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발사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 부문은 중국이 최초로 노력을 기울였던 주요 방향이었다. 약소국에서의 우주발사의 커다란 가치는 탄두를 장거리 목표에 도달시키는 것이다. 중국이 1966년 10월 실시했던 핵무기 시험에서 볼 수가 있으며, 이때 미사일이 도착 시 폭발한 목표지역인 894 km에 발사되었다. 핵실험에서의 이러한 현실이 다른 국가 특히, 미국, 소련에 불안감을 가져다주었으며,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들은 이러한 실험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신뢰할 만한 중국의 미사일 위협 때문에 1968년 최초 미국 미사일방어프로그램을 배치하려는 정당화는 소규모의 중국 핵미사일병기를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면, 중국은 우주프로그램이 중국 기술업적을 만드는 이정표로서 사용할 수 있었다. 1970년 4월 중국은 최초 위성인 동방홍-1호를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위성은 동쪽은 서쪽이라는 중국국가를 연주하였다. 중국은 민·군 우주활용을 향하여 기술적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명확히 우주개척 국가인 러시아, 미국에게 뒤져 있었고, 이들 국가의 달탐사 우주경쟁은 1969년 7월 종료되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웠으며, 이러한 가운데 발사체와 미사일을 발사하는 능력은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중국 최초 수상인 주은래 등 몇몇 국가지도자들은 우주프로그램을 이러한 과도한 혼란 상태에서 보호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고, 이 프로그램을 인민해방군 산하로 편입시킴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조기 미사일 개발이 우주활동이 시작되고 지속할 수 있는 노력의 핵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결정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우주발사의 군사적 통제는 국가안보에 의하여 야기된 방어의 장점을 제공하였다. 우주에 관한 군·민 관계는 평화적이고 비군사적 우주활동에 대한 가능성이 중국 지도자에게 보다 명확하였기때문에 통제가 심하지 않았다.


2. 2단계 : 경제적. 기술적 발전

2단계는 문화혁명과 모택동 서거 직후와, 등소평이 1977년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우주발전은 처음에 느리게 움직였으며, 그 이유는 등소평의 중점 사항은 권력을 강화하고, 떠오르는 시장경제기구인 특별경제구역 조성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우주프로그램은 경제·기술 발전의 국가 목표에 명확하게 연계되어야만 했다. 초창기 안보 강조는 사라졌지만, 우주활동에 대한 군·민 분야의 폭넓은 분리가 있었다. 민수부문은 보다 명확하게 경제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등소평과 그의 지지자들은 객관적으로 군사적 위협은 낮기 때문에 잠시 동안 최소의 자원을 경제발전에 투입하는 판단에 도달하였다. 자원의 유용성이 있다면 우주기술의 이중성(민·군 겸용)은 이러한 변화를 하도록 하였다. 변화와 이중성 때문에 우주활용은 비교적 빠르게 안보분야에 전환될 수가 있었다. 더욱이, 등소평 체제는 중국이 보다 큰 국제사회에 쉽게 진입을 위한 부수적 수단으로서 우주 활용에 관심을 보였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중국 참여의 문을 개방하였으며, 이는 중국이 대만을 대신하여 유엔 상임이사국 회원이 되었다. 또한 우주활동은 브라질과 같은 개도국이 중국과 파트너십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명확한 우주정책을 추진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1950년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일관성 있는 시스템적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군사적 분야 특히, 핵무기를 발사하는 연구 분야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다른 우주활용에서 일어나듯이, 우주분야 후원자는 지속적인 엘리트의 관심보다 더 피해자로서 정치적 투쟁에 종종 휘말렸다. 이러한 부문은 714프로젝트 명으로 1970년대 초에 유인우주 비행분야에 진입하는데 무산된 최초 노력이라고 볼 수가 있다. 중국은 기술적으로 이러한 첨단프로그램을 준비할 능력을 갖출 수가 없었고, 그 사업은 우주의학연구소 등 몇몇 관료가 고집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러한 프로그램 노력은 실질적인 정책보다 홍보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원이 기술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의 우주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은 자원 지원과 인적자원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보다 일관성을 요구하였다. 문화혁명 종료와 재구축, 갱신된 현대화가 시작되기까지 교육시스템의 지속적인 혼란 속에서 유인우주 비행분야는 효과적으로 불가능하였다.


○ 참고문헌
 - Eligar Sadeh, " Space Strategy in the 21st Centrury(Theory and Polic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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